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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살이

해외 부재자 투표 했습니다.

1.

1997년 대선에서 권영길에게 내 한 표를 준 이후로 지금껏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진 못했습니다만, 이번에는 투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 부재자 등록을 이메일로 할 수 있게 편리하게 바뀌어서 일단 등록은 해놨지만, 100% 해야지 하는 마음은 ...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시카고까지 편도로 4시간 반을 운전해서 가야하는 부담도 부담이었고, 내 한 표의 가치에 대한 회의 역시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대학 2학년 때 개표장에 참관인으로 갔던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표들... 그 표 하나하나가 다뤄지는 현장을 목격한 스무살의 저는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소중한 한 표"가 개표장에서는 너무나 초라하게 보이더군요. 지금처럼 스캐너로 개표하기 전, 사람이 한장한장 분류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개표 부정,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부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저 많은 종이다발 속에 끼어있을 내 한표의 무게가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을 뿐이지요.


3.

한 후배가 문재인을 많이 지지하더군요. 저에게 부재자 투표 등록을 하라고 얘기해줬습니다. 후후... 길거리에서 권영길을 찍으시라고, 민중당의 장기표를 찍어달라고 지나가는 어르신 한분한분 붙잡고 호소하던 제가, 어느새 생활인이 되었고 투표 권유를 받는 위치가 되었네요. 저보다 몇 살 어리지 않은데도, 아직 저보다 열정이 훨씬 덜 식은 그 후배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4.

2002년. 노무현에게 표를 줄 수는 없었지만,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노무현을 찍어주십사 얘기했습니다. 전략이랍시고 어설프게 여기저기 글도 끄적여 댔습니다. 그의 당선으로 뛸듯이 기뻤지만, 그에게 배신과 실망을 느끼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노무현은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최고의 정치인이지만, "훨씬 잘 할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 역시 없지 않습니다.


5.

단일화 이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문재인의 당선 가능성을 자신있게 얘기해 왔습니다. 단일화는 물론, 당선까지 가능하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얘기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문재인에게 실망하고 배신당할 마음의 준비 역시 하라고... 내가 열정적으로 노무현을 지지했던만큼 그에대한 애증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재인에게 그만큼 마음을 주지 않고 있는 것 같구요.


6.

추위가 아직 한국만큼은 심하지 않던 지난 토요일 아침 7시. 온 가족과 두 후배를 밴에 태우고 시카고로 향했습니다. 투표장 안내는 큰 길가에서부터 있었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줄은 서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흥분과 긴장이 되더군요. 인주를 묻히지 않아도 되는 투표 용구로, 조심스럽게 나의 후보를 찾아서 꾹 눌러 찍었습니다. 봉투에 넣어서 투표함에 집어넣기까지 1-2분...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더군요. 끝나고 나니 초등학교 상장처럼 생긴 투표확인증을 주시길래 뭔가 훌륭한 일을 한 것 같더군요. 바깥에서는 투표소 안내문 앞에서 인증샷 찍기에 여념이 없네요. 투표할 때는 줄을 안섰는데, 사진 찍을 때는 줄을 섰습니다.^^


7.

왕복 9시간 걸려서 투표를 했습니다. 2박 3일 걸렸다는 분, 1천 마일을 달려서 투표하고 왔다는 분들에 비해서는 덜 고생했지만, 집 앞 동사무소에서 투표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 걸음이었습니다. 내 한 표는 또다시 그 투표 다발들 속에서 있는둥 마는둥 하겠지요. 스캐너가 내 한 표를 읽는데에 1초도 안걸리겠지요. 당선되든 아니든, 몇 십 만표 차이가 날 텐데, 내 한표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이겠지요.


8.

그래도, 나 스스로 마음 한 켠에 주저하게 만드는 그 무엇은 좀 덜 할 것 같습니다.

투표는 민주시민의 최소한일 뿐이라고 무시했었지만, 이것조차 하지 않고서 뭘 하고,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9시간을 투자한 투표는, 적어도 이 블로그에 글 한 줄을 더 올릴 수 있게 해주네요.

투표하지 않겠다는 한국 친구가 있으면, 5분만 시간을 내달라고 얘기할 수 있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요.

투표하길 잘 한 것 같습니다.

12월 19일... 여러분도 투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걸어서 투표장에 갈 수 있는 여러분들이 부럽습니다... ^^



시카고 2,948표 중에서 저희 일행이 4표를 보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