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경향신문에 미국의 의료민영화에 대해 다룬 특집 연재기사가 났습니다. 마이클무어 감독의 <식코>를 통해 미국의 의료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어렴풋이 알고 계시겠지만 이 기사는 좀더 깊숙히 미국식 의료의 문제들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저같이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한국도 미국처럼 의료 민영화, 의료보험 민영화를 하루빨리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출처: 경향신문
기사 중 미국 병원에서 출산하면 병원비가 2000만원이나 든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두 아들을 출산했는데 만약 저에게 의료보험 또는 메디케이드 (medicaid)가 없었다면 이 돈을 다 내야 했을 것입니다. 특히 둘째는 제왕절개를 해서 수술비가 추가되고 애 엄마가 병원에 3박 4일동안 입원해 있었더니 병원비가 3만불 가까이 나왔습니다. 물론 보험에서 다 커버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
애들 출산을 비롯해서 미국에서 근 10년을 살면서 병원을 여러번 다녀봤는데요, 단언컨대, 미국식 의료 민영화는 재앙입니다. 이런 시스템은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매번 미국 대통령 선거때마다 의료시스템 개혁은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공약인 것입니다. 장점과 단점을 좀 정리해 보겠습니다.
미국식 의료민영화의 장점
1. 의료 기술의 수준이 높다
환자들이 내는 돈이 그만큼 많고 의사들의 수입 역시 높으니 의료 서비스가 높은 건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한국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 때문에 미국에 와서 수술하는 분도 계시고, 제약업체들은 신약 하나만 제대로 개발하면 돈방석에 앉습니다. 이 점 때문에 미국은 제약분야가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겠지요.
2. 병원의 시설과 서비스가 뛰어나다
한국과 직접 비교하기는 뭣합니다만, 객관적으로 병원을 이용했을 때 그 시설과 서비스에 감동을 하면 했지 실망을 한 적은 없습니다. 특히 분만은 1인 병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거기서 그대로 분만을 합니다. postpartum이라고 분만 후 입원해 있는 병실 역시 1인 병실에 호텔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간호사들 역시 얼마나 친절한지 부르면 부르는대로 오고... 하지만 하룻밤 입원비 2천불, 3천불의 청구서를 받아보면 역시 그것은 돈의 힘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긴 하지만 말입니다만... ^^;;;
그럼에도 긍정적인 부분은 간호사들이 적절한 노동의 댓가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제 아는 분이 간호사라서 나름대로 잘 아는데요, RN이라고 불리는 4년제 대학 졸업한 간호사의 경우, 일주일에 정해진 근무시간 40시간만 일해도 4-5만불의 연봉은 충분히 받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간호사는 이것보다 더 일합니다. 이 시간을 넘어가면 시간당 보수가 1.5배가 되어 열심히만 하면 7-8만불의 연봉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3. 저소득층은 의료비를 한푼도 내지 않는다
의료비용이 이렇게나 비싼데도 사회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은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보장이 비교적 잘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향신문 기사에도 언급되었듯이 전국민의 4분의 1 정도가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의 혜택으로 의료비를 전혀 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의료보호라는 제도가 있어서 저소득층 지원책이 있긴 하지만 전 인구의 25%씩이나 커버하지는 못하지요...
저 역시 학교에서 조교를 하면서 한달에 1500불 겨우 벌 때 첫 아이를 가졌습니다. 저와 처, 모두 외국인이라서 이전까지는 메디케이드의 헤택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만, 첫 아이를 가지니까 메디케이드를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민인 신생아는 국가가 책임진다"는 뭐 그런 비슷한 얘기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메디케이드 덕분에 따로 보험이 있었지만 제 첫 아이의 병원비와 약값은 완전 공짜였습니다. 감기가 들어서 병원을 가도, 팔이 부러져서 응급실에 가도... 근 1만불 정도 나온 접골 비용이 모두 공짜였습니다. 이게 대략 연봉 2만 5천불 이하까지 지원되는 메디케이드 제도입니다.
의사 고수민씨의 뉴욕에서 의사하기 블로그에서도 그런 얘기가 종종 나오지요. 의사 쇼핑하고 다니는 사람들, 몇 만불짜리 수술을 받고도 돈 한푼 내지 않는 사람들...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저소득층이 의료비가 없어서 죽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돈 가져오지 않으면 수술시켜 주지 않겠다" 이런 말도 들을 일은 없습니다. 일단 수술을 받고 "배 째라~" 그러면 병원은 그 돈을 collection agency에게 넘기고 그 사람은 그저 개인파산을 신청하거나 뭔가 다른 방법을 찾겠지요.
전체적으로 의료비가 비싸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서 저소득층에 대한 대책도 있고 병원이 "환자 치료"라는 근본 목적을 방기하지 않도록 각종 규제가 있고 소송도 활발합니다.
그럼에도, 왜 미국식 의료 민영화는 재앙일까요? 이제부터 단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무시무시한 그 잘못된 점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식 의료민영화의 단점
1. 의료비가 비싸다
네. 다들 아시다시피 의료비가 무지무지 비쌉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나라의 10배? 아마 2-30배는 된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보험 한푼 없이 정상 출산을 하면 9개월동안 정기검진 다니는 비용이 7천불, 병원에서 자연분만 하고 2박3일동안 있는데 7천불이 듭니다. 이 시골동네에서 그 정도니까 도시에서는 훨씬 더 비싸겠지요. 여기에 유도분만, 제왕절개라도 하게되면... 3만불은 우습게 나옵니다.
저희 어머니가 미국에 손자들 보러 오셨다가 넘어져서 손목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엑스레이 찍어보니까 뼈가 부러지면서 뼛조각이 흩어져서 그것 제거하고 티타늄 철심을 박아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이틀 후 3시간 정도의 수술을 받고 입원조차 하지 않은 채 그날 바로 퇴원했습니다. 대충 비싸게 봐도 1만불 정도 나오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bill을 받아보니까... 병원비가 토탈 3만 3천불 나왔습니다! 의사 수술비 7천불, 병원 수술실 이용비 2만불, 마취사 등 기타 비용 6천불... 한국에서 암수술 하면 이정도 나옵니까?
정말 다행히도 2천만원짜리 여행자보험을 미리 들어 와서 병원이랑 가격을 깎아서 그 보험으로 다 지불할 수 있었습니다만... 만약 그 보험이 없었다면? 제가 법적 책임을 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collection agency에게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희 어머니도 전화번호를 바꿔야 했을지도 모르지요...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병원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쌉니다. 혹시 미국에서 의사나 간호사 하시는 분들이 "그 정도 서비스에 그 비용은 절대 바가지가 아니다"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바가지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한번 다치면 한 가정의 기둥뿌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비싸다는 바로 그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암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저 넘어지면서 팔을 잘못 짚어 뼈가 부러지고 그걸로 3만 3천불의 비용이 든다면... 저같은 서민에게는 너무나 부담되는 액수임에 틀림없습니다.
2. 의료보험이 비싸다
의료 민영화의 논리는 "경쟁으로 가격이 낮아질 것이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를 뻔히 보고서도 그런 얘기를 한다면 멍청하거나 거짓말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보험회사들의 경쟁으로 의료보험료가 낮아지는 건 아주 미미한 수준일 것입니다. 오히려 "원가"에 해당하는 의료비가 비싸지면 의료보험료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입차 보험료가 티코 보험료보다 훨씬 높은 걸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참고로 제가 직장에서 내고 있는 의료보험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입한 의료보험은 900불 deductible이라는 제도인데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1인당 1년 의료비 900불까지는 완전히 제 돈으로 다 내고 그것 넘어가는 것부터는 10%만 내는 것입니다. 온 가족 보험료로 제 월급에서 40불 정도가 빠져나갑니다.
"야, 괜찮다~~" 그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텐데요, 제 월급 명세서를 보면 이 의료보험료를 제 대신 제 고용주가 내주는 몫이 매달 1,015불입니다. 그러니까 저희 가족 보험료로 보험회사는 1,055달러를 매달 받습니다. 한국돈으로 140만원 정도 되는군요. 이것 뿐입니까? 치과 보험으로 제 몫과 제 고용주 몫이 매달 83불 정도 됩니다. 이 치과보험은 보험도 아닌 것이, 1년에 1천불까지만 커버되고 대부분의 항목은 50%를 out of pocket이라고 해서 제 호주머니에서 내야 합니다. 저희 동료들은 이걸 보험이라 부르지 않고 "치과 치료 할인 혜택"이라고 부릅니다.
이 정도의 보험 혜택은 미국 내에서도 상당히 좋은 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일반기업은 이 정도도 못해준다고 들었구요, 특히 개별적으로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자영업자들의 보험료는 너무너무 비싼 것이 사실입니다.
3. 의료보장의 사각지대가 생긴다
아시다시피 미국에서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인구가 16% 정도, 즉 4700만명 정도 됩니다. 저소득층과 노약자 등 전 인구의 25%는 의료비를 한푼 내지 않는 혜택을 보는 한편, 바로 그 위 소득계층은 의료보험료가 부담되어서 아예 보험 가입을 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괜찮은 직장에 다니면서 그 직장에서 단체로 계약한 괜찮은 의료보험 상품에 가입해 있습니다. 이 경우도 <식코>에서 나온 것처럼 보장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기능은 합니다. 문제는 바로 의료보험에 전혀 가입이 되어 있지 않은 16% 입니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와 거의 맞먹는 4700만명...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는 전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하고 의료보험 당연지정제를 시행해서 이런 사각지대가 없습니다만, 의료민영화의 가장 큰 폐해는 이러한 의료보험의 사각지대가 생가게 된다는 점일 것입니다. 아무리 저소득층과 노약자 의료지원을 한다고 해도, 즉 미국처럼 전 국민의 25%씩이나 그런 혜택을 누린다 해도 이런 사각지대는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 엄청난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재원은 결국 경제활동을 하는 상위 75% 계층으로부터 걷어들이는 돈이라는 것입니다. 매달 제 월급에서 세전 소득의 1.27%가 이 명목으로 빠져나갑니다. 지금 한국에서 의료보험요율이 직장인 기준으로 총소득의 3.94%입니다. 즉 개인과 회사가 각각 1.97%씩 내고 있지요? 별 차이도 없지 않습니까? 민영보험을 하게되더라도 의료보험료로 내던 그 1.97%가 전부 내 소득이 될 리가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의료 민영화...
이건 정말 재앙입니다. 주위에 미국에 조금이라도 살다 온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미국식 의료 시스템에 대해 찬양하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볼 수 있는지...
의료 선진화, 의료 시장 개방, 건강보험 합리화...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붙여도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지금 미국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보험의 사각지대에 방치될 것이고, 의료비는 천정부지로 올라갈 것이며, 의료보험료 역시 그 의료비와 발맞춰 올라갈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의료보험 체계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국민 의료보험과 의료보험 당연지정제, 이 두가지 원칙을 허물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개혁을 해야지, "문제가 있으니 갈아엎자"는 식으로 완전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행위라는 것을 똑똑이 아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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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오후 12시에 덧붙임]
ㅎㅎㅎ 눈이 핑핑 돌아가네요. 워낙 댓글을 많이 써주시고 제 블로그가 이렇게 북적북적 대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
일단 잘못된 부분 하나 정정하겠습니다. 한겨레 신문 기자분께서 지적해 주셨는데, 미국에서 65세 이상에게 주어지는 메디케어 혜택은 모두에게 "완전 무료"는 아니라고 합니다. 제 글에서 미국민의 25%는 무료 진료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썼는데 그것조차 안되는 상황이로군요...
댓글 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현직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 미국과 영국에 사시면서 경험담을 써주신 분들... 이런 것 모아서 "대한민국 의료민영화의 미래 모습" 뭐 이런 종류의 홍보만화라도 만들면 엄청 인기있지 않을까요? 의사가 청진기 한번 대고 12만원, 상처 한번 닦아내고 10만원, 내시경 한번에 천 만원... ㅎㅎㅎ 본문에 안썼지만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첫 애가 벌에 쏘였는지 뱀에 물렸는지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더군요. promptcare라고 한국의 '의원'에 해당하는 곳에 찾아갔습니다. 의사가 한번 보고 "이건 벌에 쏘인 거에요" 이 진단 하는데에 100불 청구하더군요... ㅡ.ㅡ
의료민영화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거부 반응은 충분히 높은 것 같습니다. 다만 현 정권이 의지만 있다면 이 거부반응을 사알~짝 잠재우면서 민영화를 관철시킬 기술적 수단 역시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대운하를 한번 보세요. 전국민이 반대를 했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항상 60%가 넘는 반대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4대강 정비사업"이라면서 결국 예산은 투여되고 있고 삽질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의료 민영화 역시 비슷한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장 제주도와 국제도시 등에 신설할 가능성이 있는 "영리병원"을 보십시오. 또 현재 각종 보험회사들이 판매하고 있는 의료관련 상품들... 이것들의 보장 범위를 조금만 더 확대시켜 준다면...
이런 식으로 살금살금 현행 의료보험 체계를 붕괴시켜갈 수도 있습니다.
미끄러운 경사길 (slippery slope) 이론이라고 아시는지요? A라는 상태에서 B라는 상태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을지라도, A에서 조금만 이탈한 결과가 결국 B로 가게 된다면, 그 "조금"도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을 알려주는 이론입니다. 현재 특목고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고교평준화와 비평준화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시작은 전국에 과학고를 몇 개 만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외국어고 몇 개, 이제 그 몇 개가 몇 십개로 늘어나고, 자립형사립고, 기숙학교 등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결국은 오래지않아 고교 평준화라는 제도는 그 껍데기만 유지한 채 실질적으로는 비평준화에 고교입시 부활이라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준화 정책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평준화가 그 몇 개의 과학고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미끄러운 경사길입니다. 이 미끄러운 경사길에 일단 올라서면 맨 아래쪽까지 미끄러져 내려올 수밖에 없는 것... 이게 바로 무서운 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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