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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석궁 테러, 그리고 김민수, 황우석...

고법 부장판사가 석궁으로 테러를 당했다! (관련 기사)
판결에 불만을 품은 전직 대학교수가 석궁을 그의 배에 쏘았다고 한다. 그것도 멀리서 겨냥한 것도 아니고 바로 앞에서 말이다.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이런 생각을 하며 기사를 클릭하고 댓글을 읽어보았다. 석궁을 쏜 당사자는 전직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교수 김명호 씨. 그가 불만을 품었다는 그 재판은 "교수재임용 탈락"
이건 뭔가 단순한 껀 같지는 않은데...

사건의 발단은 95년으로 올라간다. 91년 성대에 조교수로 임용되었던 김명호 박사는 95년 성균관대 본고사 수학문제의 채점위원이 된다. 문제를 살펴보다가... 오류가 있는 수학 문제를 발견한다.  (7번 문제)
당시 김명호 박사의 주장은 "이 문제를 풀다 보면 a 또는 b 벡터가 영벡터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가정에서 영벡터가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오류가 있는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문제에서 a, b, c 벡터가 영벡터가 아니라고 했는데 문제의 풀이 과정에는 영벡터라고 나오니 시험을 치던 학생들은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비유를 하자면, "돼지가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황금알임을 증명하라"는 문제와 같다는 것이다. 즉, 돼지는 알을 낳을 수 없는데, 그 잘못된 가정을 바탕으로 무엇을 증명하란 말인가? (관련 링크)

학교 측에서 김박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내놓은 모범답안을 살펴보자.
벡터를 몰라도 고1 수학에 나오는 "집합과 명제" 파트만 기억한다면 이 답안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즉, p->q 라는 명제의 진리값은 p가 참이고 q가 거짓일 때에만 거짓이고 그 외의 경우는 모두 참이다. 즉, (일상생활에서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p가 거짓이면 q가 참이든 거짓이든 p->q 라는 명제의 진리값은 참이 된다. 즉, "돼지가 알을 낳았다면 그 알이 황금알임을 증명하라"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단순하다. "돼지가 알을 낳는다는 가정은 거짓이다. 따라서 이 명제는 참이다" 이 두 문장이 바로 모범답안인 것이다.
모범답안은 바로 이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즉, 가정에서 a,b,c 벡터가 영벡터가 아니라고 했는데 주어진 식을 변형해보면 영벡터라고 나온다. 그러니까 가정이 거짓이다. 따라서 이 명제는 참이다. 증명 끝~ Q.E.D....

이 문제에 대해 "수학적"으로 해결하려던 김박사는 대한수학회와 고등과학원에 자문을 구했지만 "대답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만 듣는다. 하지만 국내 대학의 수학자 189명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법원에 제출하였다. (관련기사)
내 의견을 덧붙이자면, 오로지 "수학적"으로만 보면 제시된 모범답안은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다. 하지만 이 문제는 "나쁜 문제"이다. 모범답안을 보면, 이 문제가 측정하려는 학생의 능력은 "벡터"가 아니라 "명제의 진리값"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을 엉뚱하게도 "벡터"에 관한 복잡한 증명문제의 탈을 썼기 때문에 결코 "좋은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좋은 문제라면 가정이 참인 상태에서 벡터라는 지식 도메인 안에서 증명을 해나가는 문제라야 한다. 허무개그도 아니고, 열심히 증명해 봤더니 가정이 거짓이더라, 그러니까 이 명제는 무조건 참이다... 이게 무슨 본고사에 나올법한 수준의 문제란 말인가?

그 이후 사건의 진행과정은 한겨레 21에서 여러번 취재를 하였고 이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인 시위 중인 김명호 박사



사건의 전말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황우석 박사, 그리고 김민수 교수.

줄기세포 연구 조작 논란이 PD수첩에 의해 방송된 후, 황우석 박사는 병상에 드러누었다. 초췌한 모습을 보이며 언론 플레이를 했고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를 10번도 더 얘기했다. 일반인은 모르겠지만, 과학자들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심증이 확증으로 변해갔다. 과학자는 과학으로 얘기해야지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 얘기하는 건 아니다. 수학자는 수학으로 얘기를 해야한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실수를 저질렀으면 인정하는 아름다운 자세도 필요하다. 논문도 아니고, 일개 본고사 문제에 한 실수쯤이야 수학자 사회에서는 얘기거리도 안된다.  이 문제를 덮고자 각종 무리수를 뒀기 때문에 얘기거리로 발전해버린 것이다.
황우석 박사는 기자회견에서 "줄기세포가 하나면 어떻고 열개면 어떻냐" 고 일갈하였지만, 과학자들은 정직하지 못한 그의 논문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선배 원로 교수의 친일행적을 논문에 실었다 하여 괴씸죄로 재임용에 탈락하였다 최근 복직된 김민수 서울대 미대 교수. "성격 더러운" 김 교수는 "좋은 게 좋은거지" 하는 그 문화에 대들었다가 모진 고생 끝에 마침내 재임용 탈락이 보복성이었음을 밝혀내었다. "성격 더러운" 김명호 박사 역시 하늘같은 선배 교수들이 출제한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천기누설을 하여 과에서 미운털이 박히고, 학교 역시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그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겉으로 드러난 재임용 탈락의 명분은 연구실적 미비... 그렇게 판단한 심사위원은? 바로 그 본고사 문제를 냈던 선배 교수들... 김민수 교수 때와 상황이 너무 똑같지 않은가? (재임용 심사결과)

그간의 일들을 살펴보면 김명호 박사가 어떤 성격인지 어느정도 그려진다. 동료들과 쉽게 융화하지 못했을 것이고, 성격도 괴팍하고 학생들에게도 불친절하게 대했을 것이고... 성대에서 얘기하는 "교육자적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에 공감가는 행동들도 어느정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수학자들이 원래 그런 경향이 있다. 수학사를 읽어보면 온갖 "또라이"들이 수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업적을 쌓고 서른 이전에 비명횡사를 한다. 그들이 수학에 그만큼 미쳐있기 때문에 주위 사람, 각종 권위 이런 것에 소흘하는 것도 어느정도 특수성으로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한명의 천재가 십만명을 먹여살린다"는 국가적인 캠페인도 하면서 왜 튀어나온 못에 대해 좀더 따뜻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는 걸까? 김박사가 천재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과학에 미쳐있는 사람이 다소나마 사회부적응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 어느정도 이해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두번째로, 명문화된 교수재임용 탈락 사유는 "연구실적 미비"이다. "교육자적 자질"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도 없고, 그것이 교수재임용 탈락 사유라는 명문화된 규정도 없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은 "교육자적 자질"이 문제인데 "연구실적 미비"를 핑계로 재임용에 탈락시킨 경우로 보인다. 정말 이런 "더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랑 한 과에 있기 싫으면 "교육자적 자질" 이나 "원만한 성격" 이런 걸 명문화된 규정으로 좀 삽입했으면 한다. 그게 아니라면 "연구실적"만 가지고서 재임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제대로된 심사이다.


김박사가 판결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현직 판사에게 테러를 한 점... 분명히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엽기적인 범행을 했기 때문에 나같은 사람이 이 사람이 지금까지 겪었을 고초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가 당해왔던 불합리한 처사들에 함께 분노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마지막 희망줄을 놓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걸려도 정도를 걷는 자가 승리한다. 자신이 옳다면 상대가 무리수를 둘 때까지 기다리는 전술적 치밀함 역시 필요하다. 김민수 교수는 적어도 이런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김명호 박사는... 안타깝지만 좀 심각한 무리수를 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