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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통합형 논술, 무엇이 문제인가?

서울대가 내놓은 2008년 새 입시안이 논란이 되고 있다. 정원의 30%를 지역안배를 통해 선발한다는 좋은 내용도 있긴 하지만, 특목고 학생 선발에 치우칠 것으로 우려되는 특기자 전형과, 본고사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지는 통합형 논술에 대해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처음 통합형 논술에 대한 발표를 했을 때 교육부와 여당은 별 대응이 없다가 최근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정운찬 총장, 교수협의회 등이 나서서 반박과 진화를 하는 형국이다. "일개 대학"의 입시안에 왜 온 나라가 시끄러운가? 진정 이 논란은 대학의 자율권을 억압하는 "군사정부 시절"에나 나옴직한 반응들이란 말인가?

서울대가 좋은 대학인가 아닌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서울대의 입시안에 따라 한국의 공교육이 좌지우지되고 사교육 시장이 들썩거린다는 사실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서울대 입시안은 비단 서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모든 대학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번 입시안 중 특기자 전형만 봐도, 특목고 학생에게 유리하게 운영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결국 중학교 때부터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도록 내모는 결과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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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준화 이전, 중학교 입시를 보고 있는 초등학생들



고교 평준화가 많은 흠결이 있음에도 이를 포기할 수없는 이유는 바로 어린 나이부터 경쟁의 장으로 내모는 비인간적인 교육체제를 유지해서는 안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고교 평준화가 일부 언론의 조롱과 비난처럼 그렇게 실패한 정책인가? 얼마 전 실시한 세계 고교생 학력 평가에서 한국 학생들은 핀란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특히 문제해결력 등 고차원적인 수준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정도면 과열 입시도 막고, 학력 저하도 가져오지 않는 충분히 지켜낼만한 정책이 아닌가 말이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지만, 특기자 전형의 문제만큼 심각한 것은 통합형 논술이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 온갖 교과를 아우르는 논술 문제는 결국 변형된 본고사에 불과하다. 사실, 지금까지 "구술 면접"이라는 타이틀로 많은 대학들이 변형된 본고사를 본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다. 일례로 일부 대학에서는 본고사 스타일의 수학 문제를 내놓고 그 답을 구술하라는 식의 면접을 봤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것이 학생의 지식을 측정하는 수학 시험인가, 아니면 그 학생의 잠재력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면접 시험인가?
교육부가 대학의 본고사를 3불정책 가운데 하나로 금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 입시에서 최소한의 기회 균등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아울러, 학부모의 불안 심리에 편승한 과도한 사교육의 발흥을 조금이라도 잡아보자는 것이다. "쪽집개 과외 교사를 붙이면 본고사를 잘 볼 수 있다"는 게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안하고 정보가 없는 학부모들은 1%라도 가능성이 높으면 그쪽에 "투자"를 하게 마련이다.
과외비가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학부모 입장에서, 과외 한번 안시키고 자녀에게 통합형 논술 시험을 치르라고 할 만큼 배짱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편, 과외비가 부담스러운 학부모는 혹시 자녀가 입시에서 탈락이라도 하면 그게 충분히 뒷바라지를 못해줘서 그런 거라면서 자책을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바로 그 1%라도 높은 가능성의 차이이며, 그것이 돈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이 현상은 결국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낳고 나아가 기회 균등에 대한 믿음을 뺏아갈 수 있다.
정말 서울대에게 묻고 싶다. 이 모든 문제를 초래하는 서울대 입시안이 진정 "일개 대학"에 국한된 문제인가? 그 파급효과를 나같은 사람도 뻔히 아는데, 여전히 "대학의 (입시문제에 있어서의) 자율권"을 최상의 가치로 떠받들 수 있는가?

서울대의 입장도 전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2008년부터 수능도 점수제가 아니라 등급제이다. 그동안 고교 내신은 부풀리기 등으로 신뢰를 계속 상실해왔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많을 것으로 "믿어지는" 특목고는 내신 때문에 구조적으로 서울대에 들어오기 어렵게 되어 있다. 도대체 "좋은" 학생을 무슨 기준으로 뽑으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이런 문제제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학생을 무슨 기준으로 뽑으란 말인가" 라고 반문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4년 후 졸업할 때 좋은 학생으로 만들 것인가" 가 서울대에서 최우선 순위로 놓고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각종 포털 사이트의 댓글들도 모두 이러한 서울대의 게으름에 대해 질타를 하고 있다. "좋은" 학생 받아서 지금까지 편하게 1위 자리를 유지해오지 않았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방대한 국민 예산으로 운영되는 서울대라면 이러한 국민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을까?

서울대는 기업이 아니라 교육기관이다. 최고의 인재를 뽑고 싶어하는 기업과 똑같은 논리를 내세운다면 교육기관 서울대의 존립 기반은 사라지고 만다. input (입학생)이 상위 1%이든 10% 이든, 어쨌든 output (졸업생)이 상위 1% 라면 우리는 서울대에게 최고의 대학이라는 호칭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대학의 자율권은 바로 교육기관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한 나라의 공교육 체제를 송두리째 뒤흔들라고 주어진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며]
프레시안에 보니 정운찬 총장과의 인터뷰 기사가 있네요. 정 총장은 정부 여당이 오해를 하고 있으며 통합형 논술 방침을 철회할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며 다시한번 동문서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 총장의 지적 중 일견 타당해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서울대 신입생들이 단편적인 지식만 있는 것도 의미있는 지적이고, 논술 문제를 "잘" 만들면 사교육으로 해결이 안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총장님께서는 "신입생"만 보시고 "졸업생"은 보시지 않는지요? 신입생이 단편적인 지식만 있는 건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고등교육을 받기 전에 기초중의 기초인 공교육만 받았으니 당연히 고차원적인 사고는 떨어지겠지요. 그걸 길러주라고 고등교육기관이 있는 것이고 서울대가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정 총장의 얘기 중 "글쓰기 센터"를 운영했던 경험담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신입생의 글쓰기 능력 부족을 지적하려고 하신 말씀 같은데... 국민들의 뜻은 서울대가 교육기관으로서 그런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글쓰기 능력이 충만한 학생들 뽑는데 신경쓰기 보다는, 그런 글쓰기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서울대가 해야할 본연의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창의력이 부족하고, 통합적 사고가 부족하면 서울대에서 길러주면 됩니다. 교육기관이 그런 거 하는 곳 아닙니까? 그런데 정 총장님은 서울대 오기 전에 그런 능력 다 길러서 오라고 하십니다. 그럼 서울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동문서답입니다. 국민들이 정 총장에게 바라는 것은 "좋은" 졸업생을 배출하고 "좋은" 학교로 만들라는 것인데, 총장님은 "신입생이 문제"라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두는 곳이 다르니 해결책도 다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졸업생"을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면 제2, 제3의 "글쓰기 센터"를 만들고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지요. 지금처럼 "통합형 논술은 본고사가 아닙니다"라고 해명하고 다니는 데 쓸 시간과 정력을 좀더 생산적인 곳에 쓸 수 있겠지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