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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화

드라마는 진화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

방학을 맞아 <발리에서 생긴일>을 봤습니다. 지난 겨울에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고 해서 기대를 갖고 봤지요.
근데 첫 4부까지는 그리 감흥이 크지 않았답니다. 뻔한 4각구도, 예의 등장하는 재벌집 아들, 가난하지만 유능한 회사원... 그리고 그 둘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될 가난한 여인, 팥쥐같은 부자집 딸... 그냥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결말은 뻔했고 이야기 전개도 뻔해 보였습니다.
계속 볼까말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조금더 보기로 했습니다. 근데 5, 6부 부터 점점 재밌어 지더라구요. 나중에는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단숨에 20부작을 다 봐버렸습니다.

4각 구도는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각 캐릭터들의 입장과 그들의 생각, 행동 등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드라마를 한단계 넘어선 진보를 보여줬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매력입니다.

우선, <발리에서 생긴 일>은 솔직합니다. 부자집 아들 딸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정략적으로 결혼을 약속하는 것,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발리>는 여기서 더 나갑니다. 재벌집 아들 정재민(조인성)이 약혼자인 재벌집 딸 최영주(박예진)에게 묻습니다. "너 나 사랑하냐?", 영주는 코웃음을 치면서 대꾸하지요.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 너답지 않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하는 것에 대해 영주는 별 부담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재민도 이수정(하지원)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는 너 하고 싶은대로 살고, 나는 나 하고 싶은대로 살면 되잖아." 라면서 쿨~한 결혼생활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목적은 우리 집안 사업의 확장을 위한 상대 집안의 자금 지원이었을 뿐입니다. 이 둘의 관계에서는 너무나 흔하게 들어왔던 "노력할께" 라는 번지르한 거짓말조차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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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의 솔직함은 최영주와 강인욱(소지섭), 재민과 수정의 관계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영주는 인욱과 예전에 사귀었지만 집안 차이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주는 여전히 인욱을 그리워하지요. 그럼에도 인욱을 만나서 얘기합니다. "너 나랑 결혼할 수 없다는 거 알지?"
재민 역시 수정에게 아파트까지 얻어주면서 자기 옆에 있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합니다. "원하는 거 다 해줄께. 결혼 빼고..." 너무나 솔직하지 않습니까?

<발리>의 솔직함은 <네멋대로 해라>의 진정성의 다른 쪽 끝에 있습니다. 지난 번에 <네멋>을 본 소감을 쓴 글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드라마는 왜 그렇게 "사랑과 현실"의 갈등을 그려왔을까요? 어차피 '꿈'을 그릴 것, 이처럼 화끈하게 그리면 좀 안됩니까? 기존의 드라마는 그 속에 '현실'을 이미 짜놓았기 때문에 '일'과 '집안'을 내팽개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되기도 하였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끊임없이 현실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네멋대로 해라"에는 두 사람의 사랑에 '현실'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이나영이 밴드를 거의 내팽개치면서 양동근과 사랑을 해도 그게 그렇게 밉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라는 마력이 드라마 전체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현실을 무시한 드라마가 아니냐구요? 그것보다는 오로지 '사랑'만을 완벽하게 그려낸 꿈같은 드라마이기 때문에 '현실'이 숨쉴 공간조차 주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발리>는 이러한 <네멋>의 반대편 끝에 있습니다. 현실을 너무나 솔직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된 인욱과 수정의 러브신 하나 찾기 힘듭니다. 그들의 키스까지 방해하려 나타나는 재민이란... 참... ^^

멋대로 분류해보면 <네멋>이 사랑을 제대로 그린 판타지 장르라면 <발리>는 초사실주의 장르인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 장르의 극한이 좋습니다. 어정쩡한 것, 어설픈 타협 같은 건 내 취향이 아닙니다.

<발리>의 또다른 매력은 하지원이 연기한 "이수정"이라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의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캐릭터라고 감히 얘기드릴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캐릭터들은 대략 두 종류, 콩쥐 아니면 팥쥐입니다. 가난하지만 한없이 착하고, 팥쥐가 옆에서 괴롭혀도 묵묵히 당하고 있는 우리의 콩쥐... 멋진 남자 주인공(들)은 항상 그 콩쥐를 사랑하지요. 그런 한편, 팥쥐들은 연기에 능하지요. 뒤에서는 호박씨 까면서 남자 앞에서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끊임없이 콩쥐를 괴롭히려 함정을 파고, 상대 남자를 유혹하려는 덫을 치고...

묘하게도 수정은 콩쥐와 팥쥐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초반부터 당당히 얘기합니다. "돈많은 남자 물어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고. 그렇다고 너무나 노골적으로 재민에게 접근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자존심이 없다고 하지만 꼭 필요할 때에는 자존심을 지킴으로써 그녀만의 색깔을 보여줍니다. 재민과 인욱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도 보여줍니다. 허름한 판자집이지만 누군가 찾아오면 당장 거울 보며 머리를 가다듬고, 한밤중에 재민의 집에도 여러번 찾아갑니다.
인욱이 좋지만 그의 가난은 싫습니다. 재민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돈이 많으니까 그 인연을 놓치기 싫습니다. 이게 수정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너무나 솔직하지 않습니까?
수정은 별로 착하지도 않습니다. 4명이 나란히 앉아서 밥을 먹으며 영주가 약혼자의 지위를 과시할 때 수정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습니다. 체념도 않습니다. "누가 그 자리(부인)를 차지하는지 두고 보자구요." 라며 독한 모습도 보입니다. 영주 밑에서 꼬박꼬박 존대말 쓰면서 급사 일을 하다가도, 영주 어머니가 난리를 치고 가니까 고개 빳빳이 들고 반말로 "보시다시피 상태가 이러니 오늘 일찍 퇴근해야겠어" 라고 당당히 얘기합니다. 한마디로 그녀의 모습은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보아왔던 "한번 걸러진"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대로의 평범한, 약간은 속물인 우리네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발리에서 생긴 일>을 봤습니다. 너무나 뻔한 4각 구도이지만 재민과 영주의 대화에서, 수정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잔재미들을 발견하면서 보았습니다. 특히 몇번 등장하는 4자 대면 상황, 그 속에서 날이 퍼렇게 서있는 그들의 대화는 극도의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SBS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에 이렇게 써놓았군요. "돈만이 유일한 가치로 남은 세상 속에서 진정 우리가 찾아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네 젊은이들의 인생을 통해 짚어본다..."
"진정 우리가 찾아야 할 가치" 같은 건 미사여구에 불과하구요, 적어도 관성과 전형에서 벗어난 재미있는 드라마라도 만들어낸다면 저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줄 겁니다. <발리>는 2% 정도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바로 그 박수가 아깝지 않은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