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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화

Bowling for Columbine - 다큐멘터리가 지루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

마이클 무어 감독의 Bowling for Columbine을 보았다.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는 한바탕 사고를 쳤다. 부시 대통령을 향해, "Shame on You, Bush" 라며 이라크 전쟁에 대해 비난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나름대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 만든 다큐멘터리라서 그런지 참 재밌었다.

이 영화는 콜로라도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을 중심으로, 왜 미국은 그렇게도 총기에 의한 살인 사건이 많을까 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풀어가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은 아마 우리나라에도 보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 학교 재학생 두명이 도서관에 총을 들고 들어와서 무작정 쏘아버린 사건이다. 13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가 사망하고 수십명이 다쳤다. 이 둘은 결국 자신들의 총으로 자살을 함으로써 사건은 끝이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딱히 원한 관계에 있는 특정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무차별 대중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듯 수백발의 총알을 발사한 것이다. 그것도 고등학생이...
더군다나 컬럼바인 고등학교가 위치한 동네는 범죄자들이 우글대는 곳도 아니었다. 중산층이 살고 있는 교외 지역이었고 학생들도 대부분 백인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리고 미국은 왜 그리 총기 살인사건이 많이 일어나는가? 그것이 이 영화를 통해 마이클 무어가 찾고자 했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학생들의 정신상태에 대해 얘기를 한다.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느니, 마릴린 맨슨이 나쁜 영향을 미쳤다느니... 그런 한편, 여러가지 사회제도 탓도 한다. 총기 소지가 합법인 나라, 누구나 손쉽게 총과 총알을 구할 수 있는 유통 구조... 주위 환경과 어른들의 잘못도 얘기한다. 근처에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의 공장이 있고, 애들이 폭력적인 영화나 비디오 게임에 몰두하고, TV 뉴스에서는 자극적인 살인 사건만 크게 보도하고... 인디언의 피와 서부 개척으로 미국을 세웠다는 역사를 들먹이더니 급기야 음모론까지 등장한다. 범죄에 대한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정권은 다른 나라를 침공할 명분을 확보하고, 군수업체는 무기를 팔고, 국민들의 관심은 안보에 집중되어 복지, 인권, 환경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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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는 그 짧은 영화에 이 모든 것들을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무엇이 그 두 학생으로 하여금 이유없이 총질을 해대도록 했는지 자신의 주장은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정답이 없는 문제인만큼 감독 자신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있게 "이것 때문에 그들은 총질을 한 것이다" 라고 용감하게 주장하는 소위 전문가와 대중들에게 뒷통수를 호되게 내리치는 영화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수학자같이 얘기하면 "증명을 하지는 못했지만 반증는 열심히 한" 영화가 바로 이 영화, Bowling for Columbine인 것이다. (여담입니다만, 최근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책을 읽어서 수학에 다시 관심이 많이 가게 되었답니다... ^^;;;)

사실, 이 영화 제목 자체가 그 여러 주장들에 대해 "웃기는 소리 하지마"라고 비웃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릴린 맨슨이 그 애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폭력적인 헐리웃 영화가 그 애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그날 아침 총을 갈기기 직전에 쳤던 "볼링"이 그 애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그렇게 마녀사냥하듯이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을 비난할 문제는 아니란 것이다.

하여튼 참 재미있는 다큐멘터리였다.  다큐멘터리가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버린, 감독의 위트와 비판정신이 곳곳에 녹아있는 수작이었다. 더군다나 주장과 주장이 맞붙는 그곳에서 교차편집을 통해 한쪽을 완전히 묵사발로 만드는 화면 구성은 통쾌함마저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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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내용과 크게 상관없는 생각이 두가지 들었다.
하나는, 편집의 위대함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연기도 없고 대본도 없는 것이다. 그런만큼 편집이 다큐멘터리의 처음이자 끝인 셈이다. 사실, 이 영화의 교차편집은 좀 인위적인 냄새가 나서 그 감흥이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사실"과 "주장"이 조롱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미국총기협회(NRA)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합법적인 총기 소유가 지금의 문제를 낳았다는 인상까지 은근히 줄 정도로 NRA를 다소 적대적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그들의 주장을 가감없이 담고 있다. 누구나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는 것 등등 NRA가 스스로 당당하게 생각하는 주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얘기를 들으면 분노가 느껴지고 허튼 소리로 들린다. 놀랍지 않은가?
이쯤되면 편집의 위대함을 넘어 "맥락의 힘"을 느끼게 된다. 똑같은 주장이지만 그들의 집회나 선전에서 이 주장을 듣는다면 이만큼 반감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NRA는 한무리의 미치광이들 같다.
갑자기 생각이 조선일보로 넘어갔다. 아무리 조선일보가 나쁘다고 해도 인터뷰 정도 하고 진보적인 글을 실음으로써 "이용"할 가치가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 얼마나 허튼 소리인지를 깨달았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NRA 회원들, 그리고 회장인 찰튼 헤스톤은 분명히 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조선일보를 '이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알리고 싶다는 분들, 조선일보에 투고해서 변화시키고 싶다는 분들, 꿈 깨시라고 얘기드리고 싶다.

두번째는, 우리나라가 알게 모르게 미국과 많이 닮았구나, 그리고 점점 닮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특히 외환 위기 이후에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나 급변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부자되세요"가 광고 카피로 등장하고 10억모으기 열풍이 불고... 평생직장은 더이상 없고 능력만 뛰어나면 연공서열은 무시되고... 사실 엄숙주의와 유교적 전통이 온전히 살아있던 그 시절에 비하면 일견 진보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세계가 무한경쟁을 하는 이 마당에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걸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잠시 숨을 고르고 97년 IMF 외환 위기 이후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변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져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미국에 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것이 혹시 "아메리칸 스탠다드"는 아닌지 의심이 가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캐나다 학생들이 "가난한 사람에게도 의료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 당연함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 97년 환란 사태 이후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97년 이후로 우리나라에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국민소득 2만불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따뜻하고 통합된 사회를 추구하는 것 역시 소흘히 해서는 안되는 과제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