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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을 없엔 학교"라는 코미디: 공교육과 사교육은 경쟁 관계인가?

대학이 취업 준비기관인가?

대학에 교직과목이 있다. 예를 들어 '교육심리학'이라는 과목을 보자. 만약 어떤 대학에서 "이 과목을 들은 학생은 교원임용고사의 교육학 과목 중 교육심리학 파트는 다 맞출 수 있다."라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내세우고 그 과목을 개설하였다면?
당연히 담당 교수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교원임용고사 강의하는 선생님들처럼 출제경향 분석하고 시험에 잘 나오는 것 중심으로 정리해주고, 틀리기 쉽고 헷갈리기 쉬운 것 역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대학의 교육 목표가 "시험 합격"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그래서도 안되지 않은가? 학생들로 하여금 교양인으로서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전문가로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과목들의 대략적인 목표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수업은 다소 중구난방으로 이뤄질지라도 학생들에게 토론이라도 한번 더 시키고, 깊이 생각해 보라고 10장짜리 리포트라도 내라고 그러는 것 아니겠는가?

교직과목이 좀 와닿지 않으면 이런 건 어떤가? 신문방송학과에서 기자나 PD 취업율을 높이기 위해 '상식' 과목과 '한문' 과목을 개설한다면? 경영학과에서 대기업 취업율을 높이기 위해 TOEIC 과목과 대기업의 '적성검사' 과목을 개설한다면? 더 나아가 의대에서 의사자격시험 합격율 100%를 위해 해부학 같은 것 가르치지 않고 오로지 시험공부만 시킨다면?
이걸 대학교육의 막장이라고 부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대기업을 중심으로 이런 얘기가 나온다. "신입 사원 뽑아봤자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 대학이 무슨 신입사원 예비교육 시키는 곳이라도 된단 말인가?

20년 전, 고등학교는 대입 준비기관이었다.

이 관계를 대입 사교육 기관과 일선 고등학교의 현실로 가져와서 한번 보자.
이미연, 김보성 주연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나오던 1989년의 고등학교는 대입에 가장 최적화된 기관이었다. 그 누구도 "학교 열심히 다녀도 좋은 대학 못가요"라는 식의 투정을 부리지 못했다. 오히려 "학교가 너무 대학대학 그러니까 숨이 막힐 것 같아요" 이게 당시 고등학교를 보던 관점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20년이 지난 지금, "학교 열심히 다녀도 좋은 대학 못가요"라는 건 거의 진실이 되어 버렸다. 명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 서열화는 여전하고, 대학입시에 인생을 걸고 모든 학생들이 공부에만 매진하는 현상 역시 여전하지만... 20년 전 고등학교가 담당하고 있던 "대학 입시 준비"라는 기능을 사교육이 담당하게 된 것이 달라진 점이다.

대입 준비기관이라는 권좌(!)를 사교육에 빼앗긴 고등학교

교실 붕괴나 일선 교사들의 무력감... 근본적인 원인은 이전에 대학 입시 준비를 담당하던 고등학교가 그 주도권을 사교육에 뺏긴 것에 기인한다고 본다. "입시 대비의 본산"이라는 영광 혹은 권좌에서 밀려난 후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20년 전에는 은막의 여왕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주인공의 어머니 역할, 술집 작부 역할만 들어오는 한 노배우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고집만 피우고 있는 그런 모습이라고나 할까?
물론 원죄는 민주시민교육을 담당했어야 할 공교육에서 입시 준비를 담당했던 20년 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학에서 '시험 합격'을 최고의 목표로 내걸고 교직과목을 운영하는 것이 막장 교육이라면, 입시 준비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던 고등학교 교육 역시 막장이었음에 틀림없다. 공교육이 그 본연의 목적은 뒤로한 채, 당장의 사회적 압력과 학부모들의 요구라는 것에 못이긴 척 편승해서 0교시 수업을 하고 애들을 10시, 11시까지 자율학습이라는 명목으로 잡아놓았던 것이다. 각종 서클 및 학생회 등의 특별 활동을 장려하기는 커녕 "그러다 대학 못간다"며 협박하기 일쑤였고, 진작에 협동 학습, 프로젝트 기반 수업, 수행 평가 등이 도입될 수 있었음에도 '대입을 위한 효율"만을 강조하며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만이 유일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말 코미디인 것은, 요즘 한번씩 보도되는 "사교육을 없엔 학교"의 모습이다. 정확히 20년 전과 닮아있는, 대학 입시 준비에 최적화된 바로 그 모습이 과연 지금의 전국 고등학교들에게 장려할 모습인가? 사교육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공교육의 지상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전국의 학원을 다 없에는 것이 무어 그리 '선'이고 '정의'인가? 그곳이 학원에서 학교로 바뀔 뿐, 어치피 입시 위주 교육을 받는 것은 그대로이고 학생들은 시험 점수 높이는 것이 최고의 목표일 뿐인데...

사교육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공교육의 지상 목표?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이 취할 수 있는 스탠스는 무엇인가?
나는 공교육이 좀더 뻔뻔스러워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앞서 예를 든 대학의 경우처럼 뻔뻔해져야 한다. 대학의 교직 과목이 '교원임용고사'에서 만점 받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듯이, 고등학교 교육 역시 수능 만점을 목표로 하지 않아야 한다. 고등학교가 입시에 최적화된 사설 학원들과 입시를 놓고 경쟁한다는 것은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임에 뛰어드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게임은 판을 깨 버려야 한다. 아주 뻔뻔하게!
그리고 고등학교들은 '민주시민교육'이라는 본래 목적을 충실하게 달성하기 위해 그 역량의 대부분을 배분해야 한다. 흔히들 '인성교육'을 공교육의 목표로 알고 있겠지만, 그 용어는 지적 교육이 자리잡을 여지가 너무 적고, '착한 학생'이 교육의 목표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넓은 의미를 지니는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용어가 적절하다.
민주시민교육은 민주 시민으로서 갖춰야할 기본 소양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시민을 기르는 것이다.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시민을 기르는 교육이다. 충분히 인지적 교육과 인성 교육을 아우르는 개념이 담겨있지 않은가? 이처럼 공교육 스스로가 자신의 교육 방침에 자부심을 갖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공교육이 갖춰야할 뻔뻔스러움이다.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에 대하여

1. 현실적으로 수능을 중심으로 대학 입시가 존재하는데, 고등학교는 입시 대비라는 책무를 방기하겠다는 것인가?

이 반론에 대해서는 거꾸로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현실적으로 많은 고등학교들이 대학 입시 대비라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그럼 당신은 "고등학교의 입시 대비 능력 강화"를 대안이라 주장하는가?
나는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지금과 똑같은 수능 및 대학별 고사가 온존한다면 고등학교들은 입시 교육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수능이 자격시험처럼 바뀌어 난이도가 많이 낮아진다면? 대학이 선발방식을 보다 다양화하여 고등학교에서의 다양한 활동과 성취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면?
이런 식으로 입시 제도가 바뀔 수도 있음을 낙관하고 그 때에도 고등학교가 그 존재감을 가지려면 미리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도 학생들은 학교에서 그저 시간만 떼우고 있는데 민주시민교육이라는 것이 제대로 이뤄질 것인가?

학생들이 학교에서 그저 시간만 떼우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상 과제가 입시이고, 그 입시는 공교육보다 사교육에서 더 잘 하고 때문에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공교육은 민주시민교육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사교육에서 A라는 것을 정말 먹기 좋고 보기 좋게 포장해서 팔고 있는데, 공교육에서 똑같은 A를 좌판에 널부러 놓고 팔면 공교육을 거들떠 보기나 하겠는가? 공교육은 A를 과감히 버리고 B를 팔아야 한다. 비록 지금 대부분의 수요는 A에게 있을지라도, 공교육은 그것만이 가진 "독점력"을 이용해서 B에 대한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그 "독점력"이라는 것은 입시 제도 개혁을 비롯한 각종 교육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학교는 A가 아니라 B를 파는 곳이다. 고등학교는 대학입시 준비가 아니라 민주시민교육을 하는 곳이다. 공교육 시스템 자체가 B에 대한 수요를 스스로 창출하고 그것을 공급할 때, 학교는 비로소 그 존재 의의를 가질 수 있고 학생들은 학교가 충분히 즐거운 공간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공교육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